시편 137편
I. 형식과 배경 찾기
A. 형식
공동체 애가
B. 배경
추방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쓰라린 추방 생활을 회상하며 쓴 시.
II. 주석
A. 제1연 (1-4절): 회상과 통곡
1-4절은 “우리”가 주어로 등장하나, 5,6절에서는 “내”가 주어로 등장한다.
1절: “우리가...앉아서”(1절)는 깊은 애환과 슬픔으로 애곡함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다. “울었도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방성 대곡하다’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 하다’ ‘큰소리로 울 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이 억제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인하여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큰 소리로 우는 모습을 나타낸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그 당시의 참담한 기분과 고통이 잘 담겨 있다.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부정한 땅에서 자신들이 부정해지므로, 자신들을 정결케 씻기 위해(레 14:5, 50, 15:13, 민 19:17) 강변을 찾곤 했다(겔 1:3, 단 10:6, 행 16:13). 저들이 그 강들 둑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
시인은 ‘바벨론의 강변’과 ‘시의 산들’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그곳에 앉았고’(sham yashabnu), '또한 울었다‘(gam-bakinu)를 문장의 중앙에 두고 있다(원문순서). 즉, 그와 그의 친구들은 바빌론의 강변에 앉아 있지만,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다. 그들이 단지 바빌론의 생활이 고달파서 울지 않았다.
그들이 시온을 ‘기억할 때’ 눈물이 쏟아졌다. 이 시편에서 ‘기억하다’(zakar)는 핵심 단어이며(5.6.7절), 여기에 처음 나타난다. 그들은 기억을 통하여 힘을 얻는 대신(48편), 오히려 상처를 받고 있다. 그들은 시온이 붕궤된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린다.
2절: “버드나무」”(2절)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빔’은 잎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처량한 소리를 내는 까닭에 슬픔의 감정을 비유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걸었나니”(2절)에 해당하는 ‘탈리누’의 원형은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수금이 마치 처형당한 죄수처럼 걸려있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이 당시 시인의 마음이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가 함께 있던 이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은 예배 때 사용하던 수금을 장례 치르듯 매어 달지 않으면 안 되었고 , 그들의 기쁨의 찬양은 장송곡으로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비통한 처지에 있었다.
3절: 자신들이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에게... 청하며”에 해당하는 원어는 강제적 압력이나 명령이 아니라 ‘부탁하다’ ‘간청하다’라는 의미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비참한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4절: 이방 땅에서 “찬양”을 불신자들의 오락거리로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 부정한 땅에서는, 나팔이나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성전에서 찬양을 드린 그런 방식으로 찬양을 부를 수 없었고, 다만 추방된 유대인들의 가정 예배 시, 기도의 처소들에서 “낭송”이라 여겨질 정도로만 불러졌을 뿐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시온의 노래를 불러 보라는 이방인들의 요청에 유대인들의 비애(悲哀)는 가누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그러한 요청은 자기들이 이전에 가졌던 그 우렁차고도 아름다웠던 그 성전 예배에 대한 회상이 이방 땅에서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돌아보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추방 생활을 야기한 죄악 된 이전 삶을 기억나게 했기 때문이다.
B. 제 2연 (5-6절) : 신앙적 결심
시인은 이제 1인칭 단수로 자신의 신앙적 결심을 확인한다.
5-6절: 시인은 세 개의 가정법을 통하여 자신을 저주하는 형식으로 말한다. ‘잊는다’는 ‘충성심을 바꾼다’는 뜻이다. 시인은 6절에서 두 개의 가정 절을 제시하고, 그에 합당한 저주 기원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다. 즉, (1) 그 자신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6a), (2) 그가 예루살렘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버리라’고 선언한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 것은 노래를 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 두 절은 맹목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충성심과 견고한 신앙심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은 단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처소이다.
C. 제 3연 (7-9절): 원수에 대한 저주
7절: 시인은 다시 한번 더 기억의 주제를 가져온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억(1절)이나, 시온에 대한 기억(5-6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을 요청하고 있다(7절). 그들은 먼저 에돔의 잔혹성을 주님께 고발하고 있다. 에돔은 바벨론의 연합군이 되어 예루살렘 성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도망친 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라”는 말은 “드러내다, 벗기다”란 의미이다. 여인의 옷을 벗겨 수치를 주는 것이다(사 3:17; 애 4:21).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붕궤되어 그 기초까지 헐린다. 시인은 마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기초까지 파헤쳐진 성을 보며 성이 무너지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아픈 마음으로 말한다.
8절: 시인은 ‘바벨론의 딸’을 향하여 말하지 않고, ‘딸 바벨론’으로서 바벨론 왕국을 향하여 말한다. ‘멸망할’(sheduda)이란 분사형은 장차 멸망할 바벨론을 바라보므로, 아직 망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멸망시키는 주체는 하나님이다. 시인은 시온이 당한 대로 바벨론이 당하기를 구한다.
한편 이렇게 예루살렘을 파괴시킨 원수들을 저주한다면, 주전 539년에 이루어진 바벨론 함락이 있기 전의 상황에서 이 시가 나온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미 바벨론이 함락당하였다면 여기서처럼 구태여 바벨론을 저주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졌고,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무리를 향한 경고와 예언적 성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사정을 아는 시인은 단순히 제국의 종말 이상의 철저한 보응을 요청하는지 모른다.
9절: 마지막 절은 너무나 충격적이며,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나라의 미래를 없애는 것이다. 여기의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의 원수로서, 그 세력이 뿌리 채 뽑히길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III. 구조 분석과 수사 분석
A. 구조 분석
본시를 전체 시편의 맥락에서 보면 시온을 향한 벅찬 감격을 노래한 성전 순례 시편(120-134편)과, 그에 이어진 두 개 의 할렐루야 시편 (135. 136편) 뒤에 위치해서 고조된 분위기를 전환시킴으로써 들였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묵상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 돌연히 시인은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시온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다.
본 시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뉜다.
제 1장 (1-4절): 강가에서의 비애
제2장 (5-6절) : 자기를 저주
제3장 (7-9절): 원수를 저주
B. 수사 분석
제1연
반복-우리가, 우리의, 우리를/ 동의적 평행-노래를 청하며, 기쁨을 청하고,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은유법- 시온(여호와의 임재가 있는 곳)/ 수미 일치- 바벨론 (1절과 8절)/ 대조- 1절 울었도다(눈물) ↔ 8절 복이 있다(기쁨) / 1절 울었도다 ↔ 3절 노래하라
제2연
여호와의 노래, 시온의 노래(3절) / 평행 법-내가 너를 잊을진대,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5절) / 대조- 이방 땅 ↔ 예루살렘/ 동의적 평행 법-잊을진대, 잊을지로다 (5절), 기억하지 아니하거나(6절)/
제3연
반복을 통한 강조- 헐어버려라(7절) / 의인화-딸 바벨론(8절) / 반복을 통한 강조- 복이 있으리라(8,9절)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바벨론’으로 수미 일치를 이루며(1,8절), ‘울었다’(1절)과 ‘복이 있다’(9절)과 대조를 이루며 분위기의 대비를 만들어준다. 공간적으로 본다면, ‘바벨론의 강변’(1 절상)에서 ‘시온’에 대한 회상(1 절하), ‘예루살렘’(5,6절), ‘에돔’(7절)을 거쳐, ‘바빌론’으로 돌아오고 있다(8절).
제1장(1-4절)은 ‘바벨론’에서 시작하여(1절), ‘이방 땅’으로 마치고 있다(4절).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바벨론의 강변’에서 ‘시온을 회상하는 것(1절)으로 시작하여 ’ 시온의 노래‘와 ’ 야웨의 노래‘로 이어지고 있다(3,4절). 여기에서는 ’ 울다‘(baka, 1절)와 ’ 흥을 돋우어라‘(talal, 3절)가 대조를 이룬다.
시인은 ‘버드나무에 자신의 수금을 걸어두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sham, 1,3절)에서 그를 ‘포로로 잡아온 자들이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불러보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은 시인이 연주를 거부하고, 강바람이 버들가지를 활로 애가를 연주하도록 버려두었음을 그려주고 있다.
제2장(5-6절)은 공간에 있어서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1)‘내가 너를 잊는다면’(5 절상), (2)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6 절상), (3) ‘내가 최고로 좋아하지 않는다면’(6절 중)이라는 세 개의 가정 절과 (1) ‘내 오른 손아 차라리 말라버려라’(5 절하), (2) ‘내 혀야 차라리 입천장에 붙어버려라’ (6 절하)는 이중적 ‘자기 저주’(self imprecation)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6절에서 두 개의 가정 절을 제시하고, 그에 합당한 저주 기원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다. 즉, (1) 그 자신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6a), (2) 그가 예루살렘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버리라’고 선언한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 것은 노래를 하는 것과 연관된다. 따라서 ‘수금’(2절), ‘노래’(3-4절), ‘손(5절)’, ‘혀(6절)의 순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5-6절은 ‘예루살렘’으로 수미 일치를 이루며,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어 기억하지 않게 된다는 가정과 예루살렘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 가정에 기초하여, 자신의 손과 혀가 마비되는 저주를 하고 있다. ‘내가 너를 잊는 것’은 ‘기억하지 않는 것’과 짝을 이루므로, ‘내가 예루살렘을 그 어떤 것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은 기억과 연관된 전혀 새로운 요소가 된다.
제3장(7-9절)은 첫 두 연에 나온 ‘현재(1-4절)와 ’ 미래(5-6절)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을 회상하며(7 절상), 그때 ‘에돔 사람들이 말한 악담(7절)과 ’ 바벨론 군대가 저지른 악(8-9절)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길’ 구하면서, 그들에 대한 ‘앙갚음’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여성형(bah, 7절)으로 나오고 있으며,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그 기초까지 완전히 벗겨버리며 ‘성폭행’을 하는 영상을 간접적으로 비추고 있다. ‘헐어 벌려라, 헐어 버려라’는 반복을 통한 강조법이다. ‘헐다’(ara)는 ‘벗기다’는 뜻으로 여인의 옷을 벗겨 수치를 주는 것이다(사 3:17; 애 4:21).
8절의 ‘ 딸 바벨론’은 바벨론을 의인화한 것이다.
9절의 ‘어린아이들을 바위에 메어친다’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의 원수로서, 그 세력이 뿌리 채 뽑히길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IV. 신학화 작업
성도의 참된 기쁨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 땅에서는 기쁨의 찬송이 있을 수가 없다. 만약 거기에서 주의 주권을 기쁘게 부른다면 그것은 배교행위일 것이다. 그들은 주의 다스리심이 예루살렘에서 확증되기 전까지는 인생의 행복이나 어떤 즐거움도 예루살렘을 위한 눈물의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시온은 단순히 그들이 보금자리가 아니다. 시온은 ‘위대한 왕의 성’이다(시 48:1).
성도의 관심은 그들이 어디에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사는 곳을 주께서 다스리시는가의 문제이며, 주께서 다스리시는 곳에 성도의 참된 기쁨이 있다.
고통과 기도 속에서 기억하는 신앙 이방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당산 수치의 기억, 고통의 기억 속에서도 예루살렘을 기억하기로 자기를 세우고 다짐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는 원수들과, 예루살렘에 대한 향수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로 생활 속에서도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신앙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자기를 저주하리라는 깊은 다짐을 하고 있다. 성도들은 고통의 세월 속에서, 때로는 무너지고 싶고,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다스리심이 있던 예루살렘, 참된 기쁨이 있던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그분을 다시 앙망하고 붙잡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
V. 지평 융합의 단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떠난 인간의 삶을 긍휼히 여겨주신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황폐해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별거의 상태, 하나님과 이혼의 상태, 하나님에 대한 관심 없음의 상태, 하나님께 삐침의 상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인정하게 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금 이 순간에는 저주스럽고, 비참하고, 통탄하고, 눈물이 나는 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봤을 때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회복을 원하시는 은혜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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