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5 - [묵상] - 로마서 12장 (1) 그리스도인의 삶,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1) 그리스도인의 삶, 영적 예배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실천적 권고 본 단원은 권면으로서, 1-11장의 신학적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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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교훈(12:9-21)
9-21절은 사랑 주제를 소개하는 9절의 표제와 이를 확장 설명하는 세 개의 소 단락으로 구분된다.
1) 10-13절 일련의 연결된 교훈들
2) 14-16절 독립적인 권면들
3) 17상-21절 원수들에 대한 태도
그러면서 이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사랑의 교훈이 표제라고 했을 때, 사랑의 대상과 관련해서는 교차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표제를 확정 설명하는 10-21절은 사랑의 대상을 교차 구조로 배열한다.
a1) 그리스도인(10-13절)
b1) 비그리스도인(14절)
a2) 그리스도인(15-16절)
b2) 비그리스도인(17-21절)
<9절> 표제, 하지만 이 단락 전체가 사랑 주제만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잇지는 않다. 다만 이 사랑의 교훈이 모든 권면에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표제의 의미가 있다. 바울은 모든 권면에서 사랑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줄 곳 사랑 권면으로 돌아가고 있고, 사랑 주제의 중심성을 확인해 준다.
~H avga, ph avnupo, kritoj, ‘사랑이 거짓 없도록 하여라.’ 개역개정에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로 번역했는데, 이 어구는 명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위선이 없도록 해라. 사실 이 단락을 여는 첫 문장에는 동사가 없다. ‘’ 사랑은‘, ’ 거짓이 없는 ‘ 형용사 밖에 없다. 따라서 문법적으로는 명령이라기보다는 표제이다. ‘거짓 없는 사랑’, 그런데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한 이유는, 사랑이 거짓 없도록 하여라, 이것은 문맥상 내린 결론이다.
개역개정에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서술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 의미, 기능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10절부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명령을 주고 있다. ‘거짓 없는 사랑’을 지식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이러한 사랑을 행해야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이 시점에 그 총 주제, 표제를 ‘사랑’으로 정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구약의 총 주제를 사랑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다, 구약의 모든 계명을 이 두 계명으로 요약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새 언약의 핵심도 사랑으로 규정해 주신다.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참조. 막 12:28-31
참조. 요 13:34-35
avpostugou/ntej to. ponhro,n( kollw, menoi tw/| avgaqw/|,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들어라.’
사랑은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켜,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 주는 데서 그 진정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당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참조. 요 3:16; 13:34; 요일 4:9-11).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했는데, 예수님의 사랑의 근저에 또 다른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실 바울도 요한복음 3:16 내용을 롬 5:5-8에서 이미 얘기했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도록 하신 것, 그것은 모두 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 바울이 단순히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다. 위선이 없어야 한다. 이런 명령은 겉으로 가장된 거짓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척만 하지 진정한 사랑은 결여된 사랑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러면서 거짓 없는 사랑의 특징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들라고 명령한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그런 감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매우 행동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행동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 하고 곧바로 우리의 행동을 이야기한다. 거짓 없는 사랑이 무엇이냐?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 그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거나, 선을 행하는 것을 피하게 하는 것, 그것은 거짓된 사랑이다.
예) 부모의 사랑
일련의 연결된 교훈들(10-13절)
이 교훈들은 형식이 동일하다. 본 단락의 교훈들은 공통 형식을 취한다: 여격 명사 + 주격 형용사/분사. 여격 명사와 주격 형용사. ~에 있어서 ~하라, ~하는. 형용사가 분사 형태로도 나타난다. 동사적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형제 사랑에 있어서 서로 우애하고’(10상절)
참조. 마 12:46-50 여기서 형제는 그리스도인의 형제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을 매우 중시한다.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의 관계가 더 친밀히 여겨져야 한다. 그래서 서로를 아끼고 돌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존경에 있어서 서로 앞장서고’(10 하절)
진정한 사랑은 형제의 은사를 의심하거나 경시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부지런함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11 상절)
진정한 사랑은 앞서 제시한 사랑의 행동에 있어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지런해야 한다.
‘영으로 열심을 품고’(11 중절)
성도는 영적으로 열정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주님께 섬겨라’(11 하절)
그런데, 주님께 섬겨라. 우리가 영적으로 열정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열정이 자기 과시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그 열정의 대상이 주님이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참조. 마 7:21-23
‘소망 중에 기뻐하며’(12 상절) ‘고난 중에 인내하며’(12 중절) ‘기도에 항상 힘쓰며’(12 하절)
소망 중에 기뻐하며 고난 중에 인나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힘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난을 인내하는 원동력은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참조. 8:24-27
‘성도들의 필요한 것들에 있어서 함께 나누고’(13 상절)
‘코이노 눈 테스’(koinwnou/ntej): 함께 나누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교제하다’는 의미다. 교제의 의미가 나눈다는 의미다. 공동 소유한다는 의미다. 진정한 교제는 성도의 모든 필요를 직시하고, 그 필요를 나의 것으로 여기고 나눠주는 것이 참된 교제다. 그러면서 손님 대접을 추구하여라.
‘필요한 것들’(tai/j crei, aij):
‘손님 대접을 추구하여라.’(13 하절) 참조. 마 10:40-42; 딤전 3:2; 딛 1:8; 히 13:2; 벧전 4:9
목적격이 유일하게 사용됨. 최종적 결론이다. 1세기 바울 당시, 나그네를 위해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여행객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후해라, 적극적인 자세로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이런 나그네 대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도, 바울도, 히브리서 저자도, 베드로도 이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권면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0개의 연 이은 같은 형식의 교훈들이 주어졌다. 모두 사랑이란 무엇이냐를 구체적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독립적 교훈들(14-16절)
몇 가지의 독립적 권면들이 나열되고 있다. 14절에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 규정하고 있고, 15-16절에서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주제가 다뤄지고 있다.
<14절> euvlogei/te tou.j diw, kontaj Îu`ma/jÐ( euvlogei/te kai. mh. katara/sqe,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여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라.’
바울은 예수님의 교훈 중 산상설교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수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교훈은 헬라 세계나 유대교 안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교훈이다. 바울은 산상설교와 평지 설교의 다른 부분들도 아래에서 계속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이 교훈들에서, 다음 21절까지에서 산상설교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 참조. 마 5:44; 눅 6:27-28
롬 12:14-21과 예수님의 가르침
14절 마 5:44 박해하는 자 축복
17절 마 5:38-47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18절 마 5:9 모든 사람과 평화
19절 마 5:43-47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20절 마 5:39-43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라
21절 마 5:38-47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이겨라
형제들에 대한 사랑 교훈의 확장(15-16절)
이제는 원수에서 형제 사랑으로 전환된다. 바울은 공동체에 있어서 일체감을 깨뜨리는 장벽이 높아지는 마음임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빌 2:2-4) 따라서 ‘높은 것들을 마음에 두지 말고, 오히려 낮은 자들과 함께 어울려라.’라는 권면은 예수님의 권면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참조. 마 18:1-5) 이렇게 해서, 독립적인 교훈들이 끝나고 17-21절은 원수 사랑의 교훈들을 다시 다룬다.
원수 사랑 교훈들(17-21절)
바울이 마지막 단락에서 사랑과 관련하여, 원수 사랑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7절> mhdeni. kako.n avnti. kakou/ avpodido, ntej,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참조. 마 5:38-47
악에 대한 승리, 그것은 선이어야 한다. 교차 대칭구조이면서 인클루지오 구조 패턴을 띠고 있다. 바울의 교훈은 다시 예수님의 교훈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다.
<20절> 참조. 잠 25:21-22상 참조. 마 5:39-43//눅 6:27-30
a;nqrakaj puro.j swreu, seij evpi. th.n kefalh.n auvtou/, ‘네가 숯불을 그의 머리 위에 쌓아 놓을 것이다.’
이 내용은 잠언 25:22-23 상반 절을 기술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교훈은 예수님의 원수사랑 교훈을 반영한다. 어쩌면 이 내용은 14절, 17 하의 교훈, 즉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이냐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구약에서 ‘숯’과 ‘불’
인용적 내용의 배경이 되는 잠언 25장에서도, 분 문장에서도 이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규명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사용되는 상징의 배경적 의미를 살피게 된다. 구약에서 숯과 불은 대개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를 지칭한다. 삼하 14:7 그렇다면 바울의 교훈은 우리가 원수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악이 더욱 가중되고,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엄중한 심판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의 선행을 엄중한 심판에 목적을 두고 하라는 권면인가? 바울이 원수를 위한 우리의 선행을 그들의 엄중한 심판에 목적을 두고 하라는 적극적으로 명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맥의 전반적 내용은 그렇지 않다. 원수 사랑이지, 원수를 저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론적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은 우리의 선행이 마침내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는 심판이 더 엄중해질 것이라는 결과론적 이야기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와 다른 이해의 가능성도 있다.
‘숯불’을 고대사회의 어떤 배경에 비추어 보면, ‘부끄러움의 타는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원수들에 대한 성도들의 친절한 행동은 그들의 행동을 부끄럽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준다. 보다 적극적 의미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선행이 원수들의 회개를 반드시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강력하게 성도들을 괴롭힐 수도 있다. 성도들의 선한 의도와 그에 따른 행동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간 과정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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