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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로마서 13장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by 소북소북 2021. 3. 15.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13:1-7)

이 단락은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종이라고 하는 특별한 주제를 매우 잘 짜인 논점 전개로 기술해 간다. 바로 앞에서 사랑 주제를 다뤘고, 8절부터 또 사랑 주제를 다룬다. 그러니 어찌 보면 12:21절에서 13절 8절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사이에 이 단락, 13:1-7절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후대의 첨가 단락으로 보기도 한다. 실은 이 세상 악한 정권에 저항하는 개혁적인 사람들에게 이 단락은 불편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 현세 부정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런데 아마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원수 사랑. 이런 과정 속에서 혹시라도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인 현세 부정적으로 빠질 수 있겠다는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로마라는 세계 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데, 관계 설정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너무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부정해라, 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식의 극단적 현세 부정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세상 통치자들과 그들이 세운 제도에 대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태도에 관련한 교훈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물론 죄와 사탄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상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세상의 부정한, 불의한 영향력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육체적인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 세상의 정부와 다양한 제도 위에 보편적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사실은 하나님이 그 모든 통치자들과 제도들을 관리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본 단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정부의 통치자들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바울이 강력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이다. 먼저 바울의 세상에 대한 태도가 이랬다면, 베드로의 입장을 어땠을까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비교. 벧전 2:13-17)


그렇다면 바울의 입장이나, 베드로의 입장이 다르지 않다. 아니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이들의 대정부 입장이 아마도 예수님의 입장에 기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예수님의 입장을 보면,
막 12:14-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런 입장이 베드로나 바울에게나 초대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었을 것임을 주목할 수 있다.

 

 

1 상절: 일반 명령: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라.
1 하절: 첫째 이유: 그들은 하나님께 임명받은 자들이다.
2절: 권위자들을 거스르는 결과: 하나님의 심판
3-4절: 둘째 이유: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선을 보상하고 악을 징벌한다.
5절: 일반 명령 반복: 그러므로 복종해야 한다.(진노 때문에, 양심 때문에)
6절: 일반 명령 적용: 세금을 바치라.
7절: 결론: 직접세, 간접세, 존경, 명예

본 단락의 논지 전개

<1절>  ‘각 사람(영혼)은 다스리는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도록 하여라.’ 바울은 처음부터 문제의 핵심을 명확히 선언한다.

 

‘권위자들’(evxousi, aij): 은 행정관리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왕, 총독 포함될 수 있다. 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법이 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여기서 바울이 ‘복종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복종하다’(u`potasse, sqw):는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순종하다’라는 단어와 구별해서. 이 ‘복종하다’는 단어는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이 명령은 어떤 예외적인 어떤 특정 상황들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의 가능성도 열어두는 듯하다.

 

권위란 더 높은 권위가 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권위는 위에 있는 권위에 권위를 내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귄위 체계에 있어 최고의 권위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의 권위자의 명령에 있어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되는, 반하는 그러한 명령에 대해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동사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세상 권위자에 대한 복종에 대한 최종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의하지 않은 권위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권위]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하반절은 상반 절의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왜 우리가 권위자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임명하셨기 때문에.

‘권위’: 참조. 단 4:17

 

인간의 관점에서 통치자들은, 힘이나 왕통이나 임명이나 선거에 의해, 권력을 손에 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모든 과정과 절차 이면에 하나님의 인정, 허락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주어지는 권력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존재하는 [권위]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연관된 로마 행정부의 관리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2절이 뒤따른다.

 

<2절>

‘그러므로 권위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인증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데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적극적인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임명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그들을 거역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 매우 강한 경고를 하고 있다.

 

<3-4절>
3-4절은 두 번째 이유, 세상 권위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권위자들을 임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기셨다. 그 역할이 무엇이냐?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징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권위자들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기준을 따라 살아간다면(참조. 12:2, 9, 17, 21), 그들은 세상 권위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럴까? 복음이 명령하는 선의 기준은 세상 권위자들이 요구하는 선의 기준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qeou/ dia,kono,j): 4절에서 바울은 두 번에 걸쳐서 세상의 권위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선을 칭찬하는 일과 관련해서, 두 번째는, 부정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를 보응하는 일과 관련해서. 잘하는 자를 칭찬하고 잘못하는 자를 벌하는 것은 그들 고유한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들의 기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때로는 세상 사람들은, 특히 권위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다는 의지 없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기능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주어진 기능이다. 

 

 

 

<5절> dio. avna, gkh u`pota, ssesqai( ouv mo, non dia. th.n ovrgh.n avlla. kai. dia. th.n sunei, dhsin, ‘그러므로, 단지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양심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바울은 1하-4절의 결론으로서, 1절의 명령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권위자들에게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복종하는 것은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진노 때문’: 3-4절 논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세상 권위자들의 징벌하는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소극적 이유 때문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세상 권위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그것은 양심 때문이다. 그것이 근본적 이유이다. ‘양심 때문’:이런 소극적 이유 때문에만 복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근본적 이유이다.

 

‘양심’(sunei, dhsin):그리스도인의 양심,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대한 그리스도인 내면의 자각, 내지는 지식을 뜻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의 인식, 자각 활동.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그리스도인 행동의 길잡이가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범법에 따르는 징벌을 피하려는 소극적 이유보다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양심의 인도를 따르려는 적극적 이유 때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삶은 결과적으로- 참조. 12:1-2에서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의 한 부분이다.

 

결국 12:2의 이 세상을 본뜨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제도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 많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합당한 도구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예배의 구체적 내용이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6절> dia. tou/to, ‘이 때문에’는 앞에 있는 것을 지칭하는데,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이는 5절의 ‘그러므로’(dio.)와 병행적으로 1-4절을 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통치자를 임명하셨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너희가 조세를 바친다로 이해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5절을 받는 측면도 있다. 그럴 경우 양심 때문에 조세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심 때문에 복종하는데, 그 양심 때문에 구체적으로 조세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 6절은 1-5절의 구체적 적용이다.

 

아마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납세의 의무를 잘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의견을 달랐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의 납세는 로마 정부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의 납세 행위는 마땅하다. 그러면서 6절 하반절을 보면,

 

leitourgoi. ga.r qeou/ eivsin,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고 부연한다.
앞서서 바울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내는 세금은 단지 통치자들에게 내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내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조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나라에 낸 조세도 세상에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는 것이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이다. 굉장히 긍정적이고 적극적 의미 부여를 바울이 하는 것이다.

 

 

 

<7절>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한 실천적 결론이다.

 

avpo,dote pa/sin ta.j ovfeila, j, ‘모든 자들에게 그 빚진 것을 갚아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로마 정부의 섬김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빚을 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정부에 가지게 되는 의무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납세 의미를 안 지키는 것이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내야 한다. 그 의무들로 나열된 목록들을 보면, 직접세(fo, ron), 간접세(te, loj), 존경, 명예까지도 언급한다. 그리스도인들부터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 기능,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세우신 하나님의 존중이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드러나야 한다.

 

 

적용적 결론

1-7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이 내용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본문의 그 명확한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해석적 시도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바울의 명확한 명령과 우리가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직면하는 현실 사이에는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 정책, 북한, 이슬람 정부 정책 등등.


이런 경우들은 쉽게 복종할 수 있는 상황들은 아니다. 실재로 성경 안에서 불복종의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행 5:29 하나님의 명령과 세상 권위자들의 명령이 충돌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세속 권력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수 없는 많은 제도와 명령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포기하도록 하는 명령들이다. 매우 명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 충돌되는, 반역적인 요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운데서 순교의 피를 흘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라고 한다. 불복종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손해, 순교까지 강요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기에 불복종할 것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충돌되는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이렇게 명확하지만은 않다. 어떤 때는, 사람에 따라, 역사에 따라 결정이 달라질 수 있는 다양한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큰 원칙과 구체적인 적용 사이의 긴장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1절의 원칙은 보편적인 큰 원칙이다. 모든 정부와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 맞다.

 

 

하지만 세상 통치자가 언제나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매우 명확히 적극적으로 역행하는 정책을 펼쳐 나갈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그 정책을 불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자주 핑계가 될 수 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들의 세상적인 이익과 편의를 위해 하나님을 핑계로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균형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이야기 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대부분의 삶의 자리에서 1-7절의 원리에 순종, 복종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양한 경우들마다 세상 통치자들과 하나님의 권위를 견주어서 둘 사이에 충돌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보고 판가름하는 태도는 그리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정부를 하나님이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정부에 대해 복종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로마서 13:1-7 이외의 신약 성경의 교훈들에 대해서도 게을리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정부와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참조. 딤전 2:1-2)이다. 그들이 문제가 있을 때 저항하기보다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의 명령에 전반적으로는 복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인식은 가져야 한다. 그 명령이 복음에 비추어서 명확히 상반될 때는 과감히 불복종할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안전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

 

 

 

사랑과 율법(13:8-10)

다시 사랑의 주제로 돌아간다.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정부에 대한 태도 관련 교훈에서 이웃사랑 교훈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빚’이다. 세상 권위자들에 대해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빚지지 마라. 7절에서 모든 자들에게 그 빚진 것을 갚아라라고 교훈했는데, 바울은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면서 그 교훈에 한 가지 예외가 있음을 밝힌다. 그 예외는 사랑의 빚. 그것은 예외다. 바울의 사랑 관련 교훈은 레19:18의 예수님의 교훈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참조. 마 22:34-40; 요 13:34-35

 

 

 

<8절> Mhdeni. mhde.n ovfei, lete, ‘아무에게도 빚지지 마라.’
교회 안에서 이 말씀에 의거해서, 절대 빚지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데,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극단적 문자적 적용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빚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계신다. 꾸는 상황은 있을 수 있고 그럴 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다. 피치 못할 상황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의 핵심은 아니다. 빚 관련 일반 원리는 사랑의 교훈의 발판 역할을 한다. 빚지지 말아야 하는 것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빚이다.

 

그렇다면 초점은 사랑의 빚이다. 실제로 성도들은 누구나 피차간에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사랑의 빚의 근원은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진 빚(참조. 마 18:23-35; 요 3:16)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 되갚는 것이 기대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빚은 형제에게 갚는 것이 기대된다(만 달란트 비유; 마 18:5; 25:40, 45). 해되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선심이다. 그러나 빚은 안 갚으면 벌을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빚은 가치가 절대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에게 아무리 많은 사랑을 베풀어도 여전히 형제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서로 간에 계속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마 25:31-46). 그렇다면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었을지라도 형제에게 뭔가 호의를 베풀었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형제들에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빚 갚는 방법이다.

 

이러한 형제 사랑은 빚을 갚는 것이고, 따라서 지극히 마땅한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상을 기대하는 것도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눅14:12-14. 기대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것은 빚을 갚는 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갚을 수 없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을 베풀어라.


그러나 우리는 형제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 사랑을 베풀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지만, 그 형제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깊이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필요한 자에게 내가 갚을 것을 추구해야 한다.

 

 

 

ga.r avgapw/n to.n e [teron no, mon peplh, rwken, ‘다른 이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다.’


바울은 서로 사랑이 왜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빚인가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율법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다 성취하였다.’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취하다’는 단어는 새로운 시대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결과 율법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실행 ,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 실천, 그것을 율법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요구들을 전체적으로 충족시킨 것이 된다. 모든 율법이 지향하는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자는 다른 문제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목표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아직’의 요소.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사랑해야 할 만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처지에 있다. 그 말은 우리가 다른 율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의 계명을 충분히 실행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계명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원리적 의미는 사랑이 최종적 목표다. 그러니 사랑만 하자, 사랑이 완전하면 되는데, 완전하지 안다면 완전해질 때까지 다른 계명들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는 기준이 된다.

 


<9절>

evn tw/| lo, gw| tou, tw| avnakefalaiou/tai\ avgaph, seij to.n plhsi, on sou w`j seauto, n, ‘“너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이 말씀 안에 요약되어 있다.’


바울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다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레 19:18 계명 안에서 율법의 계명들이 요약되어 있다고 부연 설명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예시들은 십계명의 7, 6, 8, 10 계명들이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계명들이 있을지라도’ 대표적인 계명들 그 외의 계명들도, 그러면 인간에 대한 다른 모든 계명들이 사랑의 계명 안에 들어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사랑의 계명이 이처럼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바울의 사상은 아마도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계명들에 달려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참조. 마 22:34-40 참조. 마 5:43-48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의 대상은 원수까지 포함된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다.

 

‘요약하다’(avnakefalaio, w): 요약의 의미는 다른 계명들의 핵심을 ‘대변해 준다’로 이해할 수 있다.

 

 

<10절> h` avga, ph tw/| plhsi, on kako.n ouvk evrga, zetai,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앞 절에서 예로 든 네 계명들의 정신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모든 계명을 요약하는 이유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따라서 그것을 금지하는 모든 계명들을, 그 동기에서부터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

 

다른 계명이 소극적 명령들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계명은 그 소극적 계명들을 능가하는 적극적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성취이다.

 

plh, rwma ou=n no, mou h` avga, ph,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성취이다.’

참조. 마 5:17-48
8절의 원리를 반복하는 원리다. 그만큼 사랑이 대표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모든 성취의 근원은 예수님께 둔다.

 

낮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삶(13:11-14) 둘째 권면 부분은 둘씩, 세 개의 쌍으로 구성된다.

 

일반 교훈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구조상 12:1-2과 관계. 처음 시작할 때,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 교훈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새로운 시대에 속한 새로운 삶의 방식, 그것은 구원의 때에 속한 자가 입어야 할 옷, 그리스도 자신으로 옷 입으라는 것으로 설명해 간다.

 

11-14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12상 절은 시각에 관한 교훈, 12하-14절은 그 ‘시각’에 비추어 행동하라는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① 12 하절: 벗어라/옷 입어라
② 13절: 단정히 행하라/하지 말라
③ 14절: 그리스도로 옷 입어라/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마라

 

또한 이들 세 쌍은 내용상, 대칭 구조를 이룬다.

 

a 벗어라
b 옷 입어라
c 단정히 행하라/하지 마라
b' 옷 입어라
a' 도모하지 마라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기초한 권면은 예수님의 권면으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에, 준비하고 있으라, 깨어있으라고 명령하는 예수님의 권면. 참조. 마 24:43-44 참조. 살전 5:1-10.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처한 시각을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시각’은 ‘시기, 기간’보다는 어떤 ‘시점’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의 교회들이 처한 시각을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한다. 이미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11 중절).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11 하절). 밤이 깊고/멀리 지나갔고 낮이 가까웠다(12 상절).

 

<11-12 상절> eivdo, tej to.n kairo, n, ‘너희가 그 시각을 안다.’ ‘톤 카이론’(to.n kairo, n)

시각 관련 세 가지 교훈
① 이미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11 중절).
②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11 하절).
③ 밤이 깊고/멀리 지나갔고 낮이 가까웠다(12 상절).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밤이 지나자마자, 해가 동트는 이른 새벽에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특히 한낮에는 찌는 더위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있었고, 따라서 새벽에 깨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는 게으른 자다. 지금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시각이, 바로 옛 시대가 지나가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새벽과도 같은 시각이라고 지금 바울은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린 새벽 시점에서 일어나 새 시대에 할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제 우리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웠다.’

여기서 ‘구원’은 명확히 미래적, 완성된 구원, 개인적인 구원보다는 구원 자체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진다.

 

 

재림의 시각과 관련된 바울의 교훈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의 생애 안에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한다. 살전 5:1-2. 그런데 그 구원의 완성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오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시점이 가까워지는 것은 맞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때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니 경성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12하-13절>‘벗는다’/‘입는다’라는 비유는 바울만이 아니라, 신약 성경 저자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두 표현 같이 - 엡 4:22, 24; 골 3:8, 12

‘벗는다’ - 약 1:21; 벧전 2:1.

‘입는다’ - 엡 6:11, 14; 살전 5:8 이렇게 해서 12:1-2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편적 교훈을 주었는데, 이제 마지막 끝날 때도 옷을 ‘입는다, 벗는다’ 유비를 통해 마무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마무리한다.

 

 

‘벗는다’는 표현은 12:2의 ‘본받는다’와, ‘입는다’는 표현은 ‘변화를 받는다’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어두움의 일들’은 구체적으로 13화에서 구체적 예들이 주어진다. ‘빛의 무기(갑옷)’은 낮처럼 적절히 행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행동은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한 것처럼, 이웃사랑, 원수 사랑이다.

 

이렇게 해서 12:1-2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편적 교훈을 주었는데, 이제 마지막 끝날 때도 옷을 '입는다, 벗는다' 라는 유비를 통해 마무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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