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실천적 권고
본 단원은 권면으로서, 1-11장의 신학적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믿는 자들을 죄의 통치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옮기셨다.
이런 관점에서 믿는 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사로잡혀 있는 삶이다. 주인이 달라졌다. 이적을 한 것이다. 죄에서 순종으로, 죄에서 하나님으로.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순종, 이러한 개념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적 개념들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과 순종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의 제반 영역에서 순종하는 영역을 다루는 본 단원의 권면은, 로마서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며, 결코 없어도 되는 부록이 아니다.
본 단원은 크게 두 소단원으로 나뉜다.
I. 12-13장: 일반적인 권면
II. 14:1-15:13: 로마교회의 특정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권면
I. 일반적 권면(12-13장)
12:1-2 문제의 핵심: 영적 예배
12:3-8 한 몸과 많은 지체
12:9-21 사랑의 교훈
13:1-7 세상 통치자에 대한 태도
13:8-10 사랑과 율법
13:11-14 빛 가운데 행하는 삶
1. 문제의 핵심: 영적 예배(12:1-2)
<1절> Parakalw/ ou=n u`ma/j( avdelfoi, ( dia. tw/n oivktirmw/n tou/ qeou/,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들로 너희를 권한다.’
권한다로 번역된 파라칼로 동사는 권위를 가지고 권면하는 것을 뜻한다. q kdnfdms 여기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로마 교회를 권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들’ 덕분에 존재한다. 여기서 ‘자비들’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자비, 한걸음 나아가서 그리스도 통치 안에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 이것이 이 ‘자비들’의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엄청난 자비들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술한다. 그래서 바울은, 부연한다.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라.’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사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죄를 방관하거나 조장하지 않는다(참조. 6:15 이하). 교회가 타락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은 오히려 의로운 삶을 자극한다. 이전의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죄를 섬겼다. 6장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우리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6:13;19
몸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여기서 몸은 인간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감정, 내면세계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과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존 스토트의 적용을 보면,
Stott의 적용
우리의 발은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우리의 입술은 진리를 말하며, 우리의 손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우리의 팔은 외롭고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감싸 안으며, 우리의 귀는 고뇌에 지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우리의 눈은 겸손하고 끈기 있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th.n logikh.n latrei, an u`mw/n,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이다.’
바울은 이런 삶을 영적 예배라고 한다. 참된 예배란 의식적(儀式的)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이기에 우리가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와 방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참된 예배란 언제나, 어디서든지, 우리가 직면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몸을 죄에게 바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뜻한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순종의 삶이 동반되지 않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 사 1:10-17; 58:1-11; 암 5:21-24
매일, 자기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없다면, 매주일 함께 모여서 드리는 의식적 예배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이 분명하다. 주일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자기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점으로 드려져야만 한다. 그 모든 삶의 자리, 그 시간, 그 만남 속에서 전적으로 자기 전체를, 그것들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그 예배의 정점으로서의 주일 예배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주일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가 의미 있으려면 그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그 예배를 받으신다.
우리가 예배를 바르게 잘 드리려고 할 때, 자주 착각하는 문제 중 하나가, 예배 시간 잘 지키고, 옷을 잘 입고 가고, 그리고 가능한 한 교회 장식을 아름답게 하고, 음향을 신경 쓰고, 성가대를 신경 쓰면 예배가 잘 드려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2절> mh. suschmati, zesqe tw/| aivw/ni tou, tw|, ‘너희는 이 세상을 본뜨지 말고’
갈 1:4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믿는 자는 이미 이 세상에서 구출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완성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악한 세상은 여전히 계속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몸도 늘 이 악한 세상의 유혹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타락한 세상을 본뜨도록 하는 압력은 강력하고 간교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본뜬다는 것은, 본체는 다른데, 겉모습을 비슷하게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압력과 유혹에 굴복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때로는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적지 않은 부분에서 이 세상을 본뜨고 있다. 내 주인이 누구인가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악한 세상을 대항하는 원동력인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8장에서 그 부분을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 시대의 능력이신 성령을 의지해서 이 세상의 풍조를 본뜨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는 것, 그것이 산제사의 중요 요소이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avlla. metamorfou/sqe th/| avnakainw,sei tou/ noo.j eivj to. dokima, zein u`ma/j ti, to. qe, lhma tou/ qeou/( to. avgaqo.n kai. euva, reston kai. te, leion,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여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새로워진 이성과 가치관으로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무엇이 비난받아 마땅한지 분별해 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에 있어서 타락한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이다. 마음이 먼저 변해야 한다. 마음이 새롭게 변해야 관심도 달라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무가치한 마음에 내버려 두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이다. 유대인은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거기에 머무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의 궁극적 표현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덕적으로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완전한 것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얻게 된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기준을 잘 보았다(참조. 마 5:17-48). 바울은 이 큰 원리를 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구체적 모습을 기술해 나간다.
2. 한 몸과 많은 지체: 겸손과 상호 섬김의 원리(12:3-8)
참된 예배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인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은사에 대한 올바른 자기 평가와 아낌없는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앞서서 6-8장에서도 도덕적 권면이 주어졌었다. 거기에서는 개인과 관련된 권면이었다. 그러나 12장부터는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개인윤리에서 공동체적 윤리.
<3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현명하게 생각하여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여러 은사들이 주어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어서 우월 의식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자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에 대한 높은 평가는 대단히 위험하다. 나는 이 정도야.. 스스로 높이는 것, 내가 아니면 안 돼... 그러한 경향은 하나님 백성의 하나 됨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연적인 재능이거나 은사적인 능력이 아닌, 믿음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믿음이란 것이 무엇일까? 그 속성이 무엇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겸손이다. 영으로 가난한 자.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믿음과 교만은 이처럼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특징을 갖는다.
<4-5절> 하나님의 백성은 그 개념 자체가 공동체를 전제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어서, 몸 전체의 건강과 성장과 기능을 위해서는 각기 자신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공동체에 적용한다.
우리는 한 몸 안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하면서 서로를 섬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자기 자신만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을 쫒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희생하게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ou [twj oi` polloi. e] n sw/ma, evsmen evn Cristw/|( to. de. kaqV ei-j avllh, lwn me, lh,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자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
<6절> e;contej de. cari, smata kata. th.n ca, rin th.n doqei/san h`mi/n dia, fora,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 다른 은사들을 받았다.’
은사와 공동체.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각각 다른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은사’는 하나님과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선물이나 재능을 가리킨다. 교회는 은사를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않는 자들로 나뉘어 있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사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은혜에 따라 각 사람에게 다양하고 상이한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 은사들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중요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은사의 중요도에 따라 사람의 중요도가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사역과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은사는 하나님의 소명과도 연관된다.
모든 은사들은 중요하고 유용하다. 자신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남을 섬기기 위해서 은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소수의 특출한 사람들에게 많이 의존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로서,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 모두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동체의 생명은 은사들을 조화로운 상호 작용과 사역에 의존한다. 바울은 그 다양한 은사들을 6 하부터 8절까지 나열한다.
ei;te profhtei, an kata. th.n avnalogi, an th/j pi, stewj, ‘혹 예언이면 믿음의 비율에 따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목록들에 언급된 상당수의 은사들이 생활의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은사들이다. 예언 이후에 곧바로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돕는 은사들이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은사에 있어서 섬김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섬기는 다양한 기능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자신들도 넉넉하지 않은 처지에서 어려운 자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공동체, 마케도니아 교회들, 고린도, 빌립보 교회들이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은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7-8절>‘혹 섬김이면 섬김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침으로, 혹 격려하는 자면 격려로, 나누는 자는 관대함으로, 돌보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목록들에 언급된 상당수의 은사들이 생활의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은사들이다. 예언 이후에 곧바로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돕는 은사들이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은사에 있어서 섬김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섬기는 다양한 기능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자신들도 넉넉하지 않은 처지에서 어려운 자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공동체, 마케도니아 교회들, 고린도, 빌립보 교회들이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은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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