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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베드로전서 3장 요약

by 소북소북 2021. 4. 9.

베드로전서 3장

구조

2:18-25 사환들
3:1-6 아내들
3:7 남편들
3:8-17 일반적인 권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신원
3:18-22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원

내용

1-2절: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 불신자 남편(참조. 4:17). ‘아내가 자기 남편의 관습과 종교의식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회적인 배경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Balch, Origin, 240-46).


‘말[‘로고스’] 없이도’: ‘말씀[‘로고스’]을 순종하지 않는’에 대한 언어 유희. 말로 하는 전도에는 반응이 없다가도 헌신적인 삶으로 보여주는 아내의 무언의 전도에 의해 회심할 수 있다는 것. 저자의 의도는 말로 전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순결한 행실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남편에 대한 순종도 무조건적인 맹종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함.
Egalitarian and complementarian.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따로 구분된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2절: ‘두려워하며’(경건하고, ‘엔 포보’):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바른 번역이 아님. 남편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님.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의미(참조. 1:17; 2:17, 18).

 

3-4절: 인간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대비.
‘온유하고 정숙한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내들이 지니게 된 새로운 성품을 가리킴.

3절의 소극적인 권면은 4절의 적극적인 권면을 강조하기 위함. 겉치장보다는 속 사람을 단장하라는 말. 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라는 의미. 한국의 성형문화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외모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속 사람의 아름다움

 

 

 

5-6절: 아내에 대한 권면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예를 예화로 사용.

 

‘이와 같이’는 3-4절만이 아니라 1-4절 전체를 받는다. 1절의 ‘순종하다’(휘포타소) 동사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 하나님을 믿었던 구약의 경건한 여인들. 이들을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윤리적인 모범으로 소개함. 이들 중 사라를 구체적인 예로 사용함.
창 18:12. 베드로는 사라가 웃었다는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단지 그가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에 대해 ‘퀴리오스’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에 초점을 맞춤. 고대 사회에서 남편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개념은 항상 존재했지만 아내가 남편을 ‘주’로 부르는 것은 고대 문헌들 속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다(마이클스, 368).

 

6절에서 ‘선을 행한다’(아가또포이에오)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불신자 남편에 대한 그리스도인 아내의 순종은 남편의 종교를 따르는 것까지 포함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에서 실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두려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불신자 남편의 종교를 따르지 않을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7절: 아내에 대한 권면은 여섯 절을 할애하고 남편에게는 한 절을 할애한 것은 아마 베드로가 억압받았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1절에는 불신자 남편과 결혼한 그리스도인 아내의 경우가 언급됨.

 

‘지식을 따라(카타 그노신)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이것은 단지 아내와 성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아내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이다.

 

‘귀하게 여기라’(직역: 존귀함을 보여줘라)는 그리스도인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야 할 사랑과 넓은 이해심을 표현함.

 

‘더 연약한 그릇’은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이지, 소위 ‘더 연약한 성(性)’이라는 의미가 아님.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해줌.

 

‘너희 기도’는 남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공동 기도생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믿는 남편과 아내를 일종의 작은 교회로 봄. 서로 신앙을 북돋아주어야 하는 관계라는 것. 사탄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접근 방법이 아닐까?

 

8-17절: 일반적인 권면

베드로는 2:18부터 당시에 흔히 통용되던 가사 법전을 특유하게 각색한다. 사환들, 아내, 남편, 그리고 3:8부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그의 권면을 강화시킨다.


8절의 ‘마지막으로’는 이 서신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권면들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5개의 형용사를 사용.
‘마음을 같이하여’: 동일한 견해를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연대 속에서 연합한다는 의미 (live in harmony, NIV).


9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는 2:21의 반복. 윤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행실(8절)과 원수를 친히 갚지 않는 것(9절)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참조. 1:15; 2:21).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단순히 종말론적인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선한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이다.

 

10-12절: 시 34:12-16(33:13-17 LXX) 인용. 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여기서 서로 대조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서로 다르게 대하시는 두 대상은?
의인과 악인. 최종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

 

 

13-17절

벧전 3:13-17은 2:19-20과 평행본문.
10-12절의 구약 인용문을 독자들의 상황과 연결시킨다.


13절: ‘해하리오’(카코오)는 12절의 악(카카)을 행하는 자의 악과 연결된다.
‘열심히 선을 행하면’은 11절의 ‘선을 행하고’와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와 연결된다. 따라서 13절의 내용은 성도들이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고난당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불신자들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고난 당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13절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편에 서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신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의인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 없이 담대히 선을 행하라는 격려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14절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담대히 선을 행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14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이사야 8:12의 칠십 인 역 인용.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해석상의 문제는 ‘그들의 두려움’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벧전의 문맥에서는 후자인 것으로 보임.


구약 MT: 그들이(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문자적: ‘그들의 두려움’
LXX: 그를(앗수르 왕) 두려워하지 말며 τὸν δὲ φόβον αὐτοῦ οὐ μὴ φοβηθῆτε οὐδὲ μὴ ταραχθῆτε 문자적: ‘그의 두려움’
베드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τὸν δὲ φόβον αὐτῶν μὴ φοβηθῆτε μηδὲ ταραχθῆτε,
사 8:12의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는 “그들(즉,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칠십 인 역의 의미는 “그(즉, 앗수르왕)를 두려워하지 말라”=”그에 대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는 칠십인역의 단수 ‘그, 아우투’를 복수 ‘그들, 아우톤’으로 바꿨다. αὐτοῦ  αὐτῶν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직역하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구별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구별하여] 섬겨’. 여기서 사용된 ‘하기아조’ 동사는 주를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구별하여 섬긴다는 의미이다.

 

16절: ‘선한 양심’: 하나님 앞에서의 고결한 인격(personal integrity before God).
‘그리스도 안에 있는’(엔 크리스토) 너희의 선행: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착한 행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17절:
개역개정: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역: “그러므로 만일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


NIV: It is better, if it is God's will, to suffer for doing good than for doing evil.


한글 번역의 뉘앙스처럼, 마치 성도가 고난 가운데 사는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 받아야지, 악을 행하면서 고난 받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2:19-20과 일맥상통하는 말.

 

이 단락의 교훈: 의롭게 살면서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일 모두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손해를 입하고 해하려는 사람만 봐서는 안 된다. 그 사람 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3:18-22절: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원

18절: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의 육신은 죽고 영이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님. 예수의 물질적인 부분(몸)과 비물질적인 부분(영혼)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님. 예수의 지상적 실존과 부활한 상태 간의 구별을 말한다. 신약에서의 부활은 언제나 육체의 부활을 말한다. 실제로 육신이 죽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이 어떤 제한이나 방해가 없는 영역 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의미(마이클스, 433).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

1. 대홍수를 통해 멸망당한 자들의 영혼들
2. 죄악으로 말미암아 대홍수를 초래했던 타락한 천사들(창 6:2의 ‘하나님의 아들들’)
3. 이 천사들로부터 생겨난 ‘더러운 영들’

 

 

예수께서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행사하여 쫓아내셨던 ‘악한’ 또는 ‘더러운 영들’이라면, 예수께서 이 ‘영들’을 쫓아내셨을 때 그들이 피난처를 구하자(막 5:10, 12)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막 5:13).
무엇을 선포했을까? 그들의 ‘피난처’가 이젠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옥’으로 번역된 ‘퓔라케’는 ‘감옥’ 또는 ‘피난처’의 의미를 갖고 있다.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 ‘불순종하던 영들’. 베드로전서에서 이 표현은 로마 사회에서 베드로와 독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주범인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우연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 이방인들 배후에 이 불순종의 영들이 있음을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 영들을 찾아가 그들의 요새를 파괴하고 승리를 선포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들을 비방하는 이방인들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홍수는 유대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베드로가 주목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물을 통한 구원이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 겨우 여덟 명이라’: 그 당시에도 구원받은 자가 많지 않았던 것처럼 독자들 당시에도 믿는 자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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