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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로마서 14장 로마 교회를 향한 권면

by 소북소북 2021. 3. 16.

로마교회의 특정 문제들 해결을 위한 권면(14:1-15:13)

14:1-15:13까지는 전체가 14:1과 15:7의 공통된 명령, 즉 동료 신자들을 ‘받으라’라는 명령으로 전체 단원을 감싼다. 특정 문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교훈이, 전 단원이 서로 받으라는 상호관계와 관련된 교훈이다. 여기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의 하나 됨의 교훈은 일차적으로 당시 로마교회가 직면한 구체적 문제에 대한 권면이라는 점이 이 단원의 구체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단원 전체는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14:1-12 서로를 정죄하지 마라
14:13-23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마라
15:1-6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15:7-13 서로를 받아라

서로를 정죄하지 마라(14:1-12)

본 단락은 세 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된다.

 

(1) 1-3절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마라
(2) 4-9절 권면의 신학적 근거
(3) 10-12절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마라

 

첫 번째 소단락의 내용이 세 번째 단락에 반복된다. 다만 차이는 순서가 바뀐다. 비판이 먼저 나오고, 업신여기다가 뒤에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신여기다. 업신여기다로 인쿨루지오 되어 있는 구성이다. 그 안에 비판하지 마라가 들어있는. 강한 자에게 먼저 강한 명령이 주어지고 있고 약한 자에게도 부대적으로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마라(1-3절)

<1-2절>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연약한 자는 아마도 자신의 신앙 양심이 어떤 특정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연약한 자가 누구냐‘와 관련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다. Cranfield는 여섯 가지의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그중에 세 가지가 중요한 것들이다.

 

‘연약한 자’의 정체(Cranfield)


(1) 율법 공로주의자들/율법준수주의자들-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2) 우상제물을 먹지 않는 자들- 고전 8, 10장
(3) 유대인 대다수의 불신앙을 애통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금하는 유대인들
(4) 육체의 절제를 위해 좋은 것을 먹지 않는 자들
(5) 고대 종교-철학적 경향의 영향
(6) 율법준수주의자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신앙 양심상 구약의 의식법들을 여전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자들(+안식일, 절기)- 오늘날 금주(금연)

 

첫 번째는 율법 공로주의자들/율법 준수 주의자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람들의 문제가 여기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믿음이 연약 한자로 본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여기 율법공로주의자들, 율법준수주의자들, 즉 자신들의 율법 행함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여기서 연약한 자들이 이들이고 이들을 바울이 용납해주라는 것이라는 건데, 그것은 말이 안 된다. 바울은 그들을 굉장히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우상제물을 먹지 않는 자들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시장에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그것을 안 먹는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제안은, 율법준수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런 의식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연관된다, 칭의와 연관된다고 보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신앙 양심상 구약의 의식법들, 그것을 여전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고기를 아예 먹지 않는다. 여기에는 안식일이나 절기도 포함된다고 본다.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 술 먹지 말라는 말은 없다. 그래도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 양심상 안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담배는, 성전을 거룩히 여기라 해서 안 피우는 사람들도 있다. 피우고 안 피우는 것이 그들에게는 신앙 양심의 문제다. 교회의 문화다. 구원의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양심상 난 안 피우고 안 마신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듯이, 여기 로마교회 문제는 구약성경에 보다 명확하게 언급되어 잇는 문제들이다. 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신학적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꼭 구원의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그래도 성경에 이렇게 하지 말라 했으니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로마 교회의 문제는 구약 성경에 명확하게 나온 문제들이다. 그들은 이것을 구원의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안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은 가능성이 없고, 6번은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바울의 권면은 강한 자들에게 먼저 주어진다.

 

약한 자를 받아라 하고, 비판하다는 3절에도 또 나온다. 거기에 동사와 여기의 명사는 다르다. 번역을 좀 달리하는 게 좋다. 그들의 의견에 대해 가타부타 논쟁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약한 자들이 마음에 상처 받는다는 것이다. 예) 청년부 안에서 금주, 금연으로 논쟁하지 마라, 약한 자들이 상처 받는다.

 

‘강한 자들’은 아마도 로마 교회의 주축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고, 이방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주된 멤버들이 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다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방인들 중심 세력. 그러나 당연히 유대인도 포함된다. 강한 자들은 고기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서 연약한 자들은 채소만 먹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 양심상 고기는 아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이유가 정확하게는 결론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기는 아니라는. 아마도 바울은 3절에 의거하면, 강한 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바울은 취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은 연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절> evsqi, wn to.n mh. evsqi, onta mh. evxouqenei, tw,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여라.’

참조. 마 18:10
업신여기다 는 동사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게 취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태도다. 왜 고기를 안 먹어? 사실 예수님께서도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참조. 마 18:10 작은 자들은 문맥상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연약한 자들. 작은 자들은 모든 제자들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연약한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마라고 했다. 강한 자에 대한 권면은 이미 1저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었었다. 다시 한번 강한 자들에게 먼저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강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연약한 자들에게도 권면한다.

 

 

o` de. mh. evsqi, wn to.n evsqi, onta mh. krine, tw,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않도록 하여라.’

참조. 마 7:1-5
판단하지 않도록 하라.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다른 문제이기도 하지만, 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술 마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돼서 술을 마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비판하는, 판단하는 태도는 철저한 신앙 기준을 가지는 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자들에게 대할 수 있는 일반적 태도다. 바울은 이런 양자의 문제를 지적한 후에, 그런 문제의 태도를 취하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찾는다. 3절 하반절에,

 

o` qeo.j ga.r auvto.n prosela, beto,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강한 자든 연약한 자는 하나님은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의 성향의 문제이다. 이제 이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내용이 4-9절에서 발전해 가고 15:7에서 최종적으로 확증된다.

 

권면의 신학적 근거(4-9절)

<5절> ‘어떤 이는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긴다.’
바울은 여기에서 강한 자와 연약 한 자가 부딪히는 또 하나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날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입장 차이다들. 바울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날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이 날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제안들이 있다.

 

날의 정체


(1) 금식일 준수(2-3절과 연관)- Weiss, Leenhardt (Fitzmyer)
(2) 구약 의식법에 규정된 특별한 날들 준수(특히 안식일)-Barrett, Cranfield, Dunn, Fitzmyer, Moo-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 입장을 취함.
(3) 안식일 준수와 주일 준수 사이 갈등-Longenecker, (Black)
(4) 길일과 흉일(그리스-로마 종교)-Kasemann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사실 안식일 준수는 사실 유대인들의 일상에서 음식법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지켜온 규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가 이것들을 지키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드러나는, 음식법도 그렇고 안식일도 그러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o] j de. kri, nei pa/san h`me, ran, ‘어떤 이는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

참조. 갈 4:10; 골 2:16
믿음의 연약한 자들의 입장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대다수의 성도들은 주일 성수의 개념에 집착한다.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서. 이 날을 저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경향. 그런데 이것을 바울이 볼 때는 이것이 정죄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연약한 자들의 문제이지.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

 

 


<6절>  ‘그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바울은 이 중에서 어떤 입장이었을까? 분명 안 지켜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살펴보았지만- 참조. 갈 4:10-11, 안식일에 대한 바울의 입장. 바울은 가능하면 날도, 해(안식년)도 지키지 않기를 원했다.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헛되게 하는. 헛되게 가는 위험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가능하면 날도, 달도, 절기도, 해도 지키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게 안전하고 성숙한 , 강한 자의 모습이다. 이것이 아직 약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이것이 율법준수주의, 율법공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더 위험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율법준수주의, 율법공로주의가 갈라디아 교회에서처럼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교회 일치를 깨는, 서로서로를 공격함으로써, 그런 상황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교훈의 방향이 다르다.

 

사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도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골 2:16 안 지키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한다. 안 지키는 것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강한 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음식을 먹어도 되고, 날도 모두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성취로 말미암아 다 동일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이지만 아직도 음식법에 얽매여 있고, 날에 차이를 두는 사람을 바울은 ‘약한 자’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 각자가 자기 마음에서 확정하라고 결론을 내린다. 각자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의 문제로 자기에게 적용해야 되지, 이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남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율법주의와 연결되면 위험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로마 교회의 상황은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다. 마음에서 확정하는 대로 하면 된다. 왜냐하면,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며...’

 

주님을 위해서 하는 한, 개인의 신앙 양심에 따른 행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바울은 먼저 연약한 자들이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이 주님의 신앙을 거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근본 동기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잘 섬기려다 보니, 이런 문제도 더 철저하게 지키려는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을 중시 여긴다. 그러나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규례에 빠져서 율법준수주의에 빠지는 것이 대해서는 위험하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하지만 바울의 입장에서 보다 바람직한 것은 율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가 되는 것이다. 날로부터도 자유롭고, 음식법으로도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장성한 단계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연약한 자들을 변호하는 데에서 나아가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 주님을 위한 감사함으로 한다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느냐, 전통에 얽매여서 하느냐, 주님을 위해 하는 한 개인의 신앙 양심에 따른 행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의 신학적 입장에 이르러야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존중되어야 한다.

 

주일 성수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택하느냐, 세상을 택하느냐, 충성심의 문제.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하는 모든 것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 의미가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취약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7-8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주님을 위하여,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이 정도로 성숙한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당위성을 자신들의 삶의 원리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입장 여하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 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기술한 것이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위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eva, n te ou=n zw/men eva,n te avpoqnh,|skwmen( tou/ kuri, ou evsme, n,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삶의 행동 영역뿐만 아니라, 사실은 자기 존재 자체가 주님의 것이다. 몸 전체,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이처럼 주님의 것이라면 그 누구도 주님의 소유에 대해, 그의 행동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는 나의 태도에 근거가 되어야지, 이것은 나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9절> 본 절은 6-8절에서 기술된 논점의 근거를 제공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속하게 된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우리가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마라(10-12절)

<10절> Su. de. ti, kri, neij to.n avdelfo, n souÈ h' kai. su. ti, evxouqenei/j to.n avdelfo,n sou,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바울은 1-3절과 평행되게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3절의 명령의 순서를 바꾼다. 3절에서는 업신여기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는 순서였는데...... 강한 자에게 업신여기지 말라, 약한 자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비판하여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최종적 심판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12절>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계산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소유인 동료 그리스도인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 뭐라 대답할지 한번 생각해봐라.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비판했다? 그러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것이다. 마 7장.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을 자로, 우리가 적용한 기준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할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너그러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너그럽게 심판하실 것이고, 엄격하면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다. 남을 비판할 때 우리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

 

이러한 사실은,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좀 더 존중하고 용납하는 쪽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네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마라(14:13-23)

바울은 이제 ‘강한 자’에게 주는 권면에 집중한다. 마 18장에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소극적인 측면(참조. 13, 20-21절)에서는, 강한 자들 자신들의 자유가 연약한 형제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측면(참조. 15, 16, 19절)에서는 강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유가 동료들을 세우고, 그것이 나의 사랑으로 형제를 어떻게 하면 잘 세울 것인가 적극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형제를 근심시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절. 너희가 자유롭게 행한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거나 비방을 당하지 않게 하라. 덕을 세운다는 번역이 지나치다. (형제를 세우는 일)을 힘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13하-21절의 교차 대칭구조(Moo)

A. 13하절: 걸려 넘어지는 것에 대한 경고.
B. 14상절: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다.
C. 15하절: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그 누구도 망하게 하지 마라.
D. 17-18절: 하나님 나라의 속성.
C’. 20상절: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마라.
B’. 20하절: 모든 것은 깨끗하다.
A’. 21절: 동료 신자가 걸려 넘어질 그 무엇도 하지 마라.

 

 

17-18절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으로서 이 모든 권면의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해 준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러고 나서 22-23절에서는 결론이 주어진다.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리다. 바울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안식일과 관련된 것 등을 자신에게만 적용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 양심을 속여서, 거슬러서 행동하지는 마라. 신념에 따라 행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라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 행위의 종류에 상관없이 그것은 죄라고 바울은 죄의 기준을 다르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먹는 것이 죄가 될 수도, 먹지 않은 것이 죄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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